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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집트 문명_이집트의 종교

by 윤재주 2026.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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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중요성

종교는 고대 이집트인의 생활에서 거의 모든 부문에 영향을 끼쳤다고 할 정도로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예술은 종교적 상징의 표현이었다. 문학과 철학은 종교적 가르침으로 채워졌다. 고왕국의 통치 형태는 신정 정치였으며 심지어 제국 시대의 군사적 파라오들조차도 신의 이름으로 통치한다고 공언할 정도였다. 이집트의 물적 자원은 그 상당량이 정교한 무덤을 만들고 사제들을 지원하는데 소모되었다. 

초기의 종교 발전

고대 이집트의 종교는 여러 단체를 거쳤다. 소박한 다신교에서 유일신교의 초기 형태로 발전하다가 다시 다신교로 되돌아갔다. 처음에는 각 도시나 지역이 제각기 지방신을 섬긴 것으로 보이며 그 신들은 각 지방의 수호신이거나 또는 자연적 힘을 의인화한 존재들이었다. 이집트의 통일은 영토의 통합뿐 아니라 이러한 여러 신들의 통합까지도 초래했다. 모든 수호신들은 위대한 양신 르 Re로 통합되었다. 이 신은 중왕국 시대에 테베왕조의 지배권 장악과 더불어 흔히 아몬, 혹은 아몬-르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이 이름은 테베의 최고신 이름에서 온 것이다. 자연의 생장력을 의인화한 신들은 나일 강의 신인 오시리스로 통합되었다. 그 후 우주를 지배하는 이들 두 신, 즉 아몬과 오시리스가 서로 주도권을 놓고 다투었다. 다른 신들도 인정되었지만 나중에 보듯이 그들은 종속적 지위에 머물러 있었다. 

태양 신앙

고왕국 시대에는 르 신 숭배로 구체화된 태양 신앙이 압도적인 신앙 체계가 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공인된 종교로서 기능했으며 주된 기늠은 국가와 인민들에게 집단적인 불멸성을 제공하는 것이 었다. 파라오는 지상에서 이 신앙의 살아있는 대리인이었으며 그의 지배를 통해 신의 지배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르 신은 단순한 수호신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그 밖에도 르 신은 인민 개개인에게 영적 축복이나 물질적 보상을 주지는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태양 신앙은 대중의 복리가 국가의 이익과 일치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대중을 위한 종교는 아니었다. 

오시리스 숭배

이미 살펴 본 것처럼 오시리스 숭배는 자연 종교로서 출발했다. 오시리스는 식물의 성장과 나일강이 가져다주는 생명력을 의인화한 것이었다. 오시리스의 생애에 관해서는 자세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집트의 신앙에 의하면, 오시리스는 아득히 오랜 옛날에 자기 빅성에게 농사짓는 법과 그 밖의 실용적인 기술을 가르쳐 주고 법률을 가져다준 자비로운 지배자였다. 얼마 후 그는 그의  사악한 동생인 세트의 모반에 의해 살해당했고 그의 시신은 갈가리 찢겼다. 오시리스의 누이동생이자 부인인 이시스는 그의 시신 조각들을 일일이 찾아내야 그것들을 다시 한데 모은 다음, 그를 기적적으로 소생시켰다. 결국에는 지하 세계로 내려가 죽은 자들의 재판관이 되었다. 그의 유복자인 호루스는 장성하여 세트를 살해함으로써 부친의 죽음에 대한 복수다. 했다. 

오시리스 전설의 중요성

이 전설은 본래 자연 신화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시리스의 죽음과 부활은 나일 강이 가을에 마르고 봄에 홍수가 닥치는 것을 상징화한 것이 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오시리스의 전설은 좀 더 심오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즉 신들과 연관된 인간적 특성들-오시리스가 그의 신민을 향해 쏟은 아버지와 같은 심려, 그리고 그의  부인과 아들의 충직한 헌신- 은 평범한 이집트의 정서에 호소력을 갖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제 신들의 삶 속에 투영된 자신들의 고난과 승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오시리스의 죽음과 부활이 개인적 영생의 약속을 전해주는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사실이다. 신이 죽음과 무덤에 대해 승리를 거둔 만큼 그를 충실하게 따르는 개인들도 영원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끝으로 세트에 대한 호루스의 승리는 악에 대한 선의  궁극적 승리를 예시해 주는 것이었다. 

이집트인의 내세관

이집트인의 내세관은 중왕국 후기로 들어가면서 원숙하게 발전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인간이 지상에 남긴 시신의 소멸을 방지하기 위한 정교한 준비가 행해져야만 했다. 인간이 지상에 남긴 시신의 소멸을 방지하기 위한 정교한 준비가 행해져야만했다. 시신이 미라로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부자들은 자신들의 미라에 음식물과 기타 생필품을 공급하기 위해 막대한 재산을 남겼다. 그러나 종교가 성숙하면서 사후 세계에 대한 이와 같은 소박한 생각은 줄어들게 되었다. 이제 죽은 자는 생전의 그의 행실에 대한 심판을 받기 위해 오시리스 앞에 서게 된다고 믿어졌다. 

이러한 심판 체계에 포함된 시험을 통과한 모든 죽은 자들은 물질적 기쁨과 소박한 즐거움이 있는 천상으로 들어간다. 백합과 망우수가 우거진 이곳의 늪지대에서 그들은 기러기와 메추리 사냥에 끝없는 성공을 거두게 된다. 또는 그들은 맛 좋은 과일이 끊임없이 열리는 동산 한가운데 집을 지을 수도 있다. 그들은 뱃놀이를 할 수 있는 백합의 호수, 목욕을 할 수 있는 연못, 그리고 노래하는 새와 온갖 온순한 동물이 살고 있는 그늘진 숲을 발견한다. 반면에 그의 심장이 사악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드러내 주는 불운한 희생자들은 철저한 파멸을 당한다. 

윤리적 종교의 등장

이집트의 종교 발전은 중왕국 말기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태양 신앙과 오시리스 숭배는 이 무렵에 두 신앙의 최선의 국면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통합되었다. 살아있는 자들의 신이며 현세에서 선의 옹호자의 아몬의 직분은, 인간에게 영생을 가져다 주고 죽은 자를 심판하는 오시리스의 기능과 거의  동일한 중요성을 부여받았다. 이제 종교는 명백히 윤리적인 것이 되었다. 사람들은 정의를 행하고자 하는 그들의 염원을 거듭해서 고백했는데 이는 그러한 행위가 위대한 태양신을 기쁘게 하기 때문이었다. 

종교의 타악

제국이 수립되자마자 이집트인의 종교는 심각한 타락을 겪게 되었다. 종교에서 윤리적 중요성을 파괴되고 미신과 주술이 득세했다. 주된 원인은 힉소스인을 몰아내기 위해 오랜동안 격렬한 전쟁을 치르면서 비합리적인 태도가 몸에 익숙해지고 그에 따라 지성을 경시하게 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뵌다. 그 결과 사제들의 세력이 증대되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대중의 두려움을 이용했다. 그들은 죽은 자의 심장이 그의 본성을 폭로하지 않게 해 준다는 주술적 부적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또한 제문을 판매했는데 파피루스 두루마리에 적힌 이 제문을 무덤에 함께 묻으면 죽은 자들이 천상계에 쉽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문을 모아 않은 것이 사자의 서였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이 책은 이집트인의 경전이 아니라 제문들을 모아 놓은 것일 뿐이다. 

아케나톤의 종교 혁명

이렇듯 사제들에 의해 종교가 주술적 세계로 전락하자 마침내 거대한 종교 혁명이 초래되었다. 이 운동의 지도자는 기원전 1375년에 통치를 시작해서 15년쯤 후에사망하거나 또는 살해당한 파라오 아멘호테프 4세였다. 그는 가장  극악한 종교 체계 자체를 절멸시키기로 결심했다. 그는 사제들을 신전에서 몰아내고, 전통적 신들의 이름을 공공 기념물들에서 삭제해 버렸으며 아톤-태양의 옛 명칭-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신을 섬기도록 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아멘호테프 :아몬 신이 쉬 신다에서 아케나톤으로 바꾸고 또 그의  부인 네페르티티로 네 페르-네프로-아톤으로 바꾸었다. 아케나톤은 모든 것을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려는 생각에서 수도를 새로 엘-아마 르나에 건설하고 이 도시를 새로운 신에게 바쳤다.

종교의 윤리성 회복

이러한 물질적 변화보다더 중요한 것은 일련의 새로운 교리가 개혁 파라오에 의해 제시되었다는 점이다. 그는 일정한 한계는 있지만 최초로 유일 신교를 가르쳤다. 현존하는 신이라고는 오직 아톤과 아케나톤이 있을 뿐이었다. 과거의 신들과는 달리, 아톤은 인간이나 동물의 형상을 갖지 않았으며 생명을 주는 따뜻한 태양 광선으로 간주되었:그는 만물의 창조자이며, 따라서 이집트만의 신이 아니라 우주 전체의 신이었다. 아케나은 스스로를 아톤의 후계자이자 공동 통치자라고 생각했다. 파라오와 그의 부인은 아톤 신에게 예배를 드린 반면, 여타의 사람들은 살아있는 신인아케나톤에게 예배를 드려야 했다. 아케나톤은 아톤이 신이 세계의 도덕적 질서의 창시자이며, 고결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보상을 베푸는 존재라고 주장함으로써 이집트 종교의 윤리성을 회복시켰다. 그는 새로운 신을 인간성에 유익한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존재로서 그리고 그의 모든 피조물을 자비로운 눈길로 굽어보는 하늘의 아버지로 묘사했다. 이러한 신의 일관성, 정직, 자비 등의 개념은 그로부터 600년 후 히브리의 예언자들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다시 등장했다.

종교 혁명의 실패

종교 혁명에 대한 아케나톤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아톤 종교는 대중의 지지를 거의 얻지 했다. 대중은 여전히 과거의 신들에게 헌신적이었기 때문이다. 새 종교는 그들에게는 너무도 낯설었던 데다가 종전의 종교가 지녔던 매력, 즉 내세에 대한 약속을 결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아케나톤 이후의 파라오들은 아몬 신의 사제들과 결탁함으로써 과거의 신앙을 회복시켰다. 아케나톤의 계승자로서 투트왕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파라오는 그의 이름을 투탄카톤에서 투탕카멘으로 바꾸었고 수도도 엘 아마 르나에서 옛 수도인 테베로 다시 천도하면서 과거로의 복귀를 주도했다. 그의 무덤 역시 옛 의식과 사후 세계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다. 그 후 이집트 종교에서는 의식주의와 주순에 대한 믿음이 커졌다. 사제들은 신들을 속여서 구원라며 얻도록 해 준다는 제문과 부적을 팔았다. 그 결과 오시리스 숭배마저도 고매한 도덕성을 대부분 상실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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