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예술의 성격
어떠한 한 가지 해석만으로는 이집트 예술의 의미를 마땅하게 설명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이집트 예술은 집단적인 국민 생활의 열망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것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었고, 인간문제에 대한 개인적 차원의 반응을 전달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사회의 관습이 붕괴되는 시기가 여러 번 있었고, 그런 경우에는 자발적인 개인적 예술이 용인되어 꽃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거나 청년의 얼굴에서 발산되는 이상주의를 포착하기도 했다. 자연을 충실하게 재현하려는 이집트 예술가의 천재성이 전적으로 억눌렸던 적은 거의 없었다. 공공건물의 엄격한 형식에서도 사실주의적 수법이 돋보였다. 예를 들면 기둥은 야자나무줄기를 본떴고, 기둥머리의 장식은 연꽃무늬로 장식되었으며, 파라오의 조각상들은 때로 때로 정형화되지 않고 실제 인물의 초상화로 제작되었던 것이다.
건축
사회의 이익이 개인의 이익보다 앞서는 대부분의 문명에서는 건축예술중에서 가장 전형적이고 고도로 발전된 분야가 되는 경향이 있다. 이집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왕국이건 중왕국이건 신왕국이건 간에 예술가들이 가장 많은 재능을 기울인 것은 건축 분야였다. 조각과 회화도 원시적인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의 주된 기능은 신전의 장식물에 불과했다. 조각과 회화는 독립적인 예술의 지위에 오른 경우가 드물었다.
피라미드
고왕국 시대 건축의 특징적 사례는 피라미드였는데 그것은 일찍이 기원전 2770년에 처음 건설되었다. 그것을 건설하기 위해 막대한 노동력과 기술이 투입되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기제에 있는 쿠푸 왕의 피라미트 하나를 건설하기 위해서 줄잡아 20년 동안 10만 명의 인력이 동원되었을 것이라고 추산했다. 그것의 높이는 481피트였고 200만 개 이상의 석회석 덩어리가 사용되었는데 그 돌덩이들은 어찌나 정밀하게 쌓아 올려졌는지 오늘날의 어떤 석도 모방할 수 없을 정도이다. 각 덩어리의 무게는 25톤에서 15톤에 달했다. 그리고 그 돌들은 정과 쐐기로 암벽에서 분리된 다음 바퀴의 도움도 없이 (당시까지 바퀴는 알려지지 않았다.) 오로지 사람의 힘만으로 흙으로 된 경사로로 올려져 제 위치에 차곡차곡 쌓아 올려졌던 것이다.
피라미드의 중요성
피라미드의 건축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이론이 제시된 바 있었다. 그 이론 중의 하나는 고용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경제적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설명은 귄가 지나치게 늘어났다는 사실, 그리고 농업, 광업, 공업, 상업의 자원들이 더 이상 전체 인민의 되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었다는 사실을 상정하고 있다. 이 이론은 어느 정도의 타당성을 갖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피라드 건설자에게 일차적으로 종교 정치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피라미드는 의심의 여지없이 신성한 피라오들의 무좀을 의미했다. 파라오의 권력이 강할수록 그의 무덤 또한 거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파라오가 국가를 대표하는 존재였으므로 피라미드에는 분명히 정치적 의미가 깃들어있었다. 피라미드는 지배자들의 영광을 드높여 주었을 뿐 아니라, 이집트 국가의 힘이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는 이념을 고양시켜 주기도 했던 것이다
신전
그후 개인의 구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피라미드를 대신해 신전이 건축의 주요 형태로 등장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신왕국 시대에 건설된 카르나크와 룩소르의 거대한 신전들이었다. 그림들이 새겨진 거대한 수많은 기둥들은 이집트인의 놀라운 건축 재능을 보여주고 있다. 이집트 신전의 특징은 그 거대한 규모에 있다. 카르나크의 신전은 길이가 약 1300피트에 달하는 역사상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한 종교 건축물이었다. 유럽의 고딕 성당 중 아무리 큰 것이라도 이 신전의 중앙홀에 쏙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신전에 사용된 기둥들은 엄청나게 컸다. 큰 기둥은 높이가 70피트였고 직경은 20피르를 넘었다. 기둥 위에 놓인 기둥머리에는 사람 100명가량이 서 있을 수 있었다.
이집트의 조각
앞서 언급했듯이 이집트의 조각과 회화는 주로 건축의 부속물이었다. 조각과 회화에는 그 양식과 의미를 지배한 관습들이 깊숙이 배어들어있었다. 파라오의 조각상은 통상 거대한 규모로 세워졌다. 신왕국 시대에 만들어진 파라오의 조각상은 높이가 75피트에서 90피트에 달했다. 그중 몇몇은 모습을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 채색해 놓았고, 눈에는 흔히 무색 수정을 박아놓았다. 인물은 대부분 경직된 모습으로 양팔을 가슴 위에 교차해 포개어 놓거나 몸 양쪽에 가지런히 전혀 없는 무표정한 모습이었다. 종종 해부학적 왜곡이 가해졌는데 예를 들면 넓적다리의 길이는 원래보다더 늘어났고 어깨의 각이 강조되었으며, 손가락의 길이는 모두 같게 표현되었다. 비사실주의적 조각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스핑크스이다. 스핑크스는 이집트에 수천 개나 산재해 있었는데 그것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기제에 있는 거대한 스핑크스이다. 스핑크스는 사자의 몸에 파라오의 머리가 붙어있는 모습을 표현했다. 그렇게 한 목적은 파라오가 사자의 힘과 용기를 지니고 있음을 상징하고자 함이었다. 릴리프로 새겨진 인물들은 자연과 더욱 일치하지 않았다. 머리는 옆을 향하고 눈은 정면을 향해 있으며, 몸통은 앞을 향해 있고 다리는 옆을 향해 있었다.
이집트 조각의 의미
이집트의 조각이 지난 의미를 파악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파라오 조각상의 거대한 규모는 분명히 그들의 권력과 그들로서 대표되는 국가 권력을 상징하고자 한 것이 었다. 중요한 것은 정부가 더욱 절대적으로 되어감에 따라 이들 조각상의 규모도 커녔다는 사실이다. 경직되고 무표정한 모습은 국가생활의 영속성과 안정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이 추구한 이상에 의하면 국가는 불확실한 운명의 변화로 인해 정박지에서 벗어나는 일 없이 확고부동하게 정착해야만 했다. 따라서 지배자들의 초상은 근심이나 공포 또는 승리를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 되며 오랜 세월에 걸쳐 부동의 평정을 유지해야 한다. 해부학적 왜곡 역시 국가적 이상을 표현하기 위한 의도적인 시도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아케나톤 치세의 예술
이집트의 예술 발전에서 한 가지 흥미를 끄는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아케나톤의 치세에 나타난 예술이다. 고대 이집트 종교-종교의 예술적 표현까지 포함해서 로부터 단절되기를 원했던 아케나톤은 하나의 예술 혁명을 주도했다. 그가 후원한 새로운 형식은 자연주의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새로운 종교는 자연을 아톤 신의 작품으로 간주하여 존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파라오와 여왕 네페르티티의 흉상은 초기의 과장된 무표정과 왜곡을 거부하고 한층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다소 야릇하고 좀 잊을 수 없는 여성다움을 보여주고 있는 네페르티티의 현존하는 흉상은 예술사상 가장 위대한 기념물 중의 하나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아케나톤 시대의 회화 역시 고도의 표현주의적 예술 형태를 취했다. 이 시기의 벽화는 특히 움직임이라는 관점에서 경험의 세계를 묘사했다. 이들 그림은 들소가 늪을 뛰어넘는 순간의 몸짓, 놀란 수사슴의 사나운 도약, 오리들이 연못에서 한가로이 노니는 모습등을 그렸다. 그러나 아케나톤의 종교 개혁이 지속되지 못했듯이 자연주의 예술도 계속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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