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역사의 여러 단계
이집트의 고대사는 대략 6개의 시대로 구분된다. 즉 상고 또는 초기 왕조 시대, 고왕국, 제1 중간기, 중왕국, 제2중간기, 신왕국시대로 나누어진다. 이집트인은 상고 시대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수준 높은 문명의 창조를 향한 몇 가지 지극히 중요한 단계를 밟았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관개와 배수를 최초로 시도했으며 석기 대신 구리로 된 도구를 사용하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구리가 석기보다더 내구성이 있으며 무디어졌을 경우에도 날을 세우거나 다시 주조하기가 용이하다는 이점을 활용하였다.
이집트의 통일과 문자의 발명
기원전3100년경에 이집트의 전체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두 가지 업적, 즉 이집트의 통일과 문자의 발명이 이루어졌다. 그때까지 이집트는 상이집트와 하 이집트로 나뉘어진 채, 별개의 세력이 두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집트의 장래를 위해서는 통일이 필수적이었다. 나일강전지역의 관개 계획을 중앙 집권적으로 총괄하기 위해서는 단일한 정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전승에 의하면 이집트은 한 개인-그리스인은 그를 메네스로 이집트인은 나르메르로 불렀다. - 에 의해 이루어진것으로 되어있으나 오늘날의 학자들은 이집트의이 여러 세대에 걸쳐 이루어졌으리라고 보고 있다. 어쨌든 제1왕조의 한명또는 여러 명의 지배자가 이집트 통일을 이룩할 무렵에 이집츱 최초의 문자가 발명되었다. 이것은 우연의 일치는 아니었을것이다. 문자 사용은 새롭게 등장한 국가의 기록 보존 필요성에 의해서 촉발되었기 때문이다.
조세르와 고왕국의 건설
통일된 이집트의 처음 두 왕조는 기원전 2770년경에 제3왕조의 첫 번째 왕이자, 고왕국의 창시자이기도 한 강력한 지배자 조세르에 의해 계승되었다. 고왕국 시대의 정부 체계가 상고 시대의 정부 체계와 세부적으로 어떻게 다른 지에 관해서는 확실하게 알기가 어렵다. 그러나 조세르의 치세부터 한층 강화된 국왕 절대주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조세르가 피라미드를 최초로 건설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서 확연히 나타난다. 고왕국의 조세르와 그의 후계자들의 지배하에서 파라오의 권력은 사실상 무제한이었다. 파라오는 태양신의 아들로 간주되었다. 그는 관례상 그의 누이들중의 하나와 결혼했는데 이는 신성한 혈통의 오염을 방지하기위한 것이 었다.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지 않았다. 파라오의 주요 신하들은 사제들이었고 파라오 자신은 최고 제사장이었다
고왕국의 비군사적 성격
고왕국 정부는 평화 정책과 불침략 정책을 추구했다. 이 점에서 고왕국은 고대 국가들 중에서도 매우 독특했다. 파라오는 상비군을 거느리지도 않았고 국민군이라고 부를 만한 것도 없었다. 각 지방은 자체의 민병대를 보유했으나 그들은 관리들의 지휘를 받았다. 그리고 실제 복무를 위해 소집되었을 경우에도그들은 대개 공공 사업에나 투입되었다. 외침의 위협이 있을 때면 각 지역의 민병대들은 파라오의 명령에 의해 소집되었고, 파라오의 신하에 의해 통솔되었다 파라오는 그 밖의 다른 경우에는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군사력을 갖지 못했다. 고왕국 시대의 이집트인은 기대 자신들의 삶에 만족했고 다른 나라들에 대해 간섭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태도를 갖게 된 이유로는 이집트가 외침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했다는 점, 토질이 대단히 비옥했다는 점, 그리고 이집트 국가가 다른 민족의 착취를 기반으로 하지 않고 협동적인 필요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고왕국의 종말
고왕국은 수백년에 걸친 평화와 번영을 누린 후 기원전 2200년경에 제6왕조의 붕괴와 더불어 종말을 고했다. 그 의원으로 다음의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먼저 파라오들이피라미드 건설과 같은 대규모 사업에 과중한 투자를 한 결과 정부의 세입이 고갈되었다는 점이다. 설상가상으로 이집트는 나쁜 기후 조건으로 말미암은 흉작으로 인해 그 번영의 기세가 한풀 꺾이게 되었다. 그 동안 지방 귀족들은 야금야금 권력을 잠식해 들어가더니, 급기야는 중앙 정부의 권위가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다. 뒤이은 시기를 제1중간기라고 부른다. 바야흐로 무정부 상태가 도래했다. 귀족들은 자신들의 지배 영역을 경쟁적으로 장악했고, 대내적 약탈과 사막 부족들의 침입으로 인해 정치혼란은 심화되었다. 제1중간기는 기원전 2050년경에 중앙 권력을 회복시킨 제 11왕조가 등장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 뒤를 이어 이집트 역사의 위대한 시기인 중왕국이 등장했다.
중왕국
중왕국 정부는 전시기에 걸쳐 고왕국에 비해 사회적으로 더욱 안정되어있었다. 제11왕조는 귀족들의 세력에 맞서지 못했다. 그러나 기원전 1990경부터 1786년까지 지속된 제12왕조는 관리, 상인, 공인, 농민등으로 이루어진 중간 계급과 결탁함으로써 강력한 지배권을 장악했다. 이러한 결탁을 통해 귀족 계급이 견제되었고 유례없는 번영의 기초가 다져졌다. 제12왕조의 지배 기간에는 사회 정의가 증진되고 상당한 지적 발달이 이루어졌다. 실용성이 없는 피라미드 건설을 대신해서 용수로와 관개 시걸의 확대 등 전주민에게 도움을 주는 공공 사업이 시행되었다. 또한 종교도 보통 사람들에게까지 확대되어, 과거에는 허용되지 않았던 구원에 대한 희망을 그들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종교는 이제 재물에 의존하는 의식대신 도덕적 행위를 강조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제12왕조는 이집트의 고전기, 혹은 황금 시대로 간주된다.
힉소스의 침입
그러나 이집트는 그후 곧바로 제2중간기에 접어들었다. 이시기는 기원전 1786년에서 15유엔년경까지 200년이상이나 지속된 또 하나의 내부 혼란과 외침의 시기였다. 동시대에 남겨진 기록이 극히 적기는 하지만 남아있는 기록들을 통해 볼 때 국내의 무질서는 귀족들의 빤란으로 인해 초래된 것으로 보인다. 파라오들은 다시금 무력해졌고 제12왕조에서 이룩했던 사회 진보는 대부분파괴되고 말았다. 기원전 1750년경에 이르러 서 아시아에 기원을 둔 혼합 유목 민족이며 외국 땅의 지배자들이라고 불린 힉소스인이 이집트에 침입해 들어왔다. 통상 그들의 군사적 용맹은 그들이 말과전차를 보유한데 기인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그들이 쉽사리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이집트인의 분열에 힘입은것이었다. 힉소스인의 지배는 이집트의 역사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힉소스인은 이집트인에게새로운 전투 방법을 소개해 주었을 뿐 아니라 이집트 전체로 하여금 외국의 폭정에대한 불만을 갖도록 함으로써 그들로 하여 금 자신들의 분열을 딛고 공동의 대의를 위해 단결할 수 있도록 했다.
기원전 17세기 말경에 남이집트의 지배자들은 힉소스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고 이 반란에는 궁극적으로 이집트 전체가 가담하게 되었다. 1670년경에 이르러 정보자들은 대부분 살해되거나 노예 신세가 되었고 나머지는 이집트에서 쫓겨났다. 이 승리의 주역은 제18왕조의 창시자인 아모세였고 그 후 그는 기존의 어떤 체제보다도 더욱 공고한 정권을 확립했다. 힉소스에 대한 투쟁의 와중에서 분출된 애국심으로 말미암아 지방 세력에 대한 충청심은 감소되었고, 그와 더불어 귀족 세력도 약화되었다.
신왕국 시대
아모세의 즉위 이후 시대를 신왕국 시대 또는 제국의 시대라고 부른다. 신왕국은 기원전 1560년경에서 1087년존속했고 이 기간에 3개의 왕조 즉 18, 19, 20 왕조가 교체되었다. 국가 정책은 이제 더 이상 평화주의적이거나 고립주의적이지 않았다. 공격적인 제국주의정신이 급속히 전국적으로 파급되었는데 이는 힉소스에 맞서 싸운 전쟁에서의 승리로 야기된 군사적 열기가더 큰 승리를 거두고자 하는 욕구를 자아냈기 때문이다. 더욱이 침약자를 몰아내기 위해 구축된 거대한 군사 조직은 파라오의 권력 유지를 위해 지극히 가치있는 부속물임이 판명된 터라, 이를 즉각 해체시킨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제국의 실패
아모세의 후계자들이 취한 새로운 정책의 첫 단계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전면적 공격과 시리아에 대한 지배권 주장이었다. 고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거느린 새로운 파라오들은 재빨리 시리아에 있던 적대세력들을 모조리 섬멸하고 마침내 유프라테스 강에서 나일강 상류에까지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들은 피정복민의 충성을 확보하는데 실패했고 그러한 약점은 시리아에서 광범한 반란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뒤를 이은 파라오들은 반란을 진압하고 얼마동안 제국을 유지하는데 성공하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 재앙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영토를 병합했던것이다. 이집트로의 재화 유입은 사치와 타락을 부추겨 국가 기강마저 흔들어 놓았으며 피정복민의 끊임없는 반란은 결국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이집트의 국력을 소진시켰다. 기원전 12세기에 이르러 이집트는 정복지의 대부분을 영구히 상실하였다.
제국의 정부
신왕국 또는 제국가의 정부는 한층 절대주의적이었다는 점만을 제외하고는 고왕국과 모든 면에서 비슷했다. 바야흐로 군사력은 파라오의 통치 기반이 되었다. 파라오는 직업군대를 이용해 항상 신민들을 압도할 수 있었다. 과거의 귀족들 중 대부분은 이제 왕의 완전한 지배권하에서 정신이나 왕실 관료의 일원이 되었다.
파라오의 최후
최후의 위대한 파라오는 기원전 1182년에서 1151년까지 지배했던 람세스3세였다. 그러나 그후그의 이름은 물려받았으되능력은 이어받지 못한 수많은 무능한 파라오들이 그 뒤를 계승했다. 기원전 12세기 중반에 이르러 이집트는 새로운 야만족의 침입과 사회적 타락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같은 시기에 이집트인은 그들이 지녔던 창조적인 재능을 거의 대부분 상실하고 말았다. 이제 주술적 힘을 빌어 불멸을 획득하는 일만이 모든 계급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 사제들의 세력이 강력해지면서 이집트의 쇠퇴 과정은 한층 가속화되었다. 그들은 마침내 왕권을 찬탈하고 파라오의 칙령을 좌우했던것이다.
이집트의 몰락
기원전 10세기 중반에서 8세기 말경에 이르기까지 리비아의 야만인들이 세운 한 왕조가 파라오의 왕좌를 차지했다. 리비아인의 뒤를 이어 상나일 서부의 사막 지역 출신인 에티오피아인 또는 누비아인의 한 가문이 이집트를 지빼했다. 670년에 이집트는 아시리아인에 의해 정복을 당했다. 그러나 그들이 지배한기간은 겨우 8년이었다. 아시리아의 지배가 붕괴되고 나서 이집트인은 독립을 되찾았고, 그후 찬란한 문화의 부흥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때이른 종말을 맞기 위한 운명의 전주곡이었을 뿐이다. 기원전525년에 이집트는 페르시아에 의해 정복되고 말았다. 이집트의 고대 문명은 그후로는 결코 되살아나지 못했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이집트 문명_이집트인의 지적 업적 (0) | 2026.09.14 |
|---|---|
| 이집트 문명_이집트의 종교 (0) | 2026.09.14 |
| 이집트 문명 (0) | 2026.09.12 |
| 인류의 기원_문명의 기원과 성장의 요인 (0) | 2026.09.12 |
| 인류의 기원_신석기 시대의 문화 (1) | 2026.09.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