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구석기시대 기원전 3만 년경에는 후기 구석기시대가 되었다. 이 시기는 새롭고 더 우월한 형태를 갖춘 인간이 지구를 지배했다. 이들은 생물학적으로 현인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들의 가장 가까운 선조인 네안데르탈인은 이제 더 이상 하나의 독특한 종으로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네안데르탈인이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크로마뇽인 후기 구석기 시대의 인류를 대표하는 종족은 크로마뇽인이다. 그들의 이름은 남프랑스의 크로마뇽 동굴에서 유래했는데 이 동굴에서는 그들의 가장 전형적인 유물 몇 점이 출토되었다. 그들은 순록, 들소, 매머드등을 사냥하며 생활했는데 이 동물들은 빙하로 뒤덮인 추운 날씨 때문에 남부 유럽과 아시아를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크로마뇽인은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으며, 직립 보행을 했고 남자들의 평균 신장은 6피트 (뙤되 약 183cm)가 넘었다. 그들은 넓은 이마와 잘 발달된 턱 그리고 현대인과 거의 같은 두개골 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 보다 앞선 종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불쑥 튀어나온 눈두덩을 그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 크로마뇽인이 계속해서 존속했는지 여부는 논란이 많은 문제이다. 그 따라 절멸된 것으로 보이지 않으며 산악지역으로 말려나 결국 다른 종족에게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후기 구석기 시대의 문화는 이전의 문화보다 현저한 진보를 보였다. 도구와 기구들은 더욱 잘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종류도 매우 다양해졌다. 떼어낸 돌조각과 뼈만이 재료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다른 재료들 특히 순록의 뿔과 상아가 많이 사용되었다. 한층는 정교한 도구들 즉 낚시 바늘과 작살이 등장했고 이 시대 말기에는 활과 화살도 등장했다. 후기 구석기시대의 사람들이 옷을 입었다는 것은 그들이 바늘을 발명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그들은 옷감을 짜는 방법은 알지 못했으나 그 대신 동물의 가죽을 꿰매어 사용했다. 그들이 음식을 불에 익혀 먹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고기를 불에 굽는 데 사용되었음이 분명한 거대한 화로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남프랑스의 솔루트에 부근에서는 검게 탄 동물뼈가 대량으로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수십만 마리의 큰 동물들의 뼈가 섞여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크로마뇽인은 어쩌다 천연의 은신처가 없는 지역에서 볼품없는 움집을 지은 경우를 제외하면 집을 거의 집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 이전적으로 유목 생활을 했던 것은 아니다. 주거지로 사용된 동굴에서 발견된 흔적을 보면 이 동굴들이 한 차례에 여러 해씩 주기적으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후기 구석기 문화의 정신적 측면
정신적으로 면에서 후기 구석기 시대의 문화가 놀라운 진보를 이룩했음을 보여주는 징후도 있다. 집단생활은 전보다한층 고도로 조직화되었다. 솔뤼트레등지에서 발견된 대량의 까맣게 탄 동물뼈는 사냥에서 협동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공동체의 잔치에서 노획물을 나누어 먹었음을 보여준다. 놀라운 솜씨로 만들어진 그들의 도구와 무기 그리고 고도로 발달된 예술 기법은 어느 정도의 분업이 없이는 이룩되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므로 후기 구석기시대의 공동체들에는 전문적 예술가와 숙련된 장인이 있었다는 것이 확실시된다. 그러한 재능을 연마하기 위해 공동체의 몇몇 사람들은 오랜 훈련 기간을 거쳤음에 틀림없으며 그들은 전문 분야를 숙달하는데 자신들의 모든 시간을 투입했을 것이다.
공감주술
크로마뇽인이 초자연적인 성격을 띤 고도로 발달된 세계관을 지내고 있었다는 실제적인 증거가 있다. 그들은 죽은 자의 시신에 대해 네안데르탈인보다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즉 시체에다 채색을 하고 가슴 위로 팔짱을 끼게 했으며 무덤에는 늘어뜨리는 장식물 및 목걸이, 그리고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무기 따위를 부장했다. 또한 크로마뇽인은 식량을 증산하기 위해 정교한 공감 주술체계를 고안해 냈다. 공감 주술이란 원하는 결과를 모방하면 그 결과가 나타나리라는 믿음에 기반을 둔 것이다. 크로마뇽인은 이러한 믿음에 입각하여 그들의 동굴에 순록의 사냥 장면 따위를 벽화로 그렸다 또한 그들은 들소나 매머드의 진흙 형상을 만들어 놓고는 그것들을 창으로 찔러 손발을 자르기도 했다. 그러한 표현을 한 목적은 그림으로 묘사한 것을 쉽게 얻어내고 그로써 사냥에서의 성공률을 높여 생존 경쟁을 완화하자는데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그림이나 성상의 제작에는 주술이나 축제가 수반되었으며 그것들은 사냥 활동이 진행되는 동안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크로마뇽인의 예술 크로마뇽인의 가장 탁월한 업적은 그들의 예술이었다. 이 업적은 너무도 독창적이고 찬란한 것이 어서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평가되어마땅하다. 크로마뇽인의 문화가 그들 선조의 문화 사이의 커다란 차이를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것도 없다 후기 구석기시대의 예술은 당대의 물질문화 수준으로서 가능했던 거의 모든 분야를 포함했다. 조각, 회화, 새겨 넣기(돌이나 뼈)등이 성행했다. 도자기 예술과 건축 분야는 빠져있었다. 도자기는 아직 발명되지 않은 상태였고 건축물은 지극히 단순한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크로마뇽인의 예술 중 특히 뛰어난 것은 동굴 회화였다. 동굴 벽에는 그들의 재능이 가장 다채롭게 나타났다. 특히 그들은 색채 사용에서 높은 안목을 가지고 있었고 세부적인 것에 대해 매우 치밀한 묘사를 했으며 집단 장면을 묘사하는데 비례를 사용할 줄 알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자연을 세밀하게 모방할 줄 아는 천재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각별히 주목되는 것은 동작을 표현하는 그들의 솜씨였다. 벽화에 묘사된 동물들 거의 모두가 달리거나 뛰어오르거나 되새김질을 하고 있거나 궁지에 몰려 사냥꾼을 마주 대하고 있는 모습이다. 종종 움직이는 듯한 인상을 주기 위해 기발한 기법이 사용되곤 했다. 그러한 기법 중 대표적인 것은 동물의 다리나 머리가 움직인 흔적을 표시하기 위해 원관선을 덧붙여 그려 넣는 방법이었다. 그것은 기막히도록 교묘하게 표현되어서 어색한 느낌을 전혀 주지 않는다.
후기 구석기 시대예술의 중요성
동굴 회화는 원시 시대의 정신구조와 관련된 많은 문제들에 관해 중요한 해답을 제시해 준다. 크로마뇽인은 우아한 선, 대칭, 그리고 화려한 색채를 즐겼다. 그들이 자신들의 몸에 그림을 그리고 문신을 새겼다는 사실, 그리고 장신구를 착용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예술 작품의 일차적인 목적은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작품이 미적 창조를 위한 것이라는 해석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배제되어야 한다.
먼저 가장 잘 그려진 그림이 대개 동굴의 가장 어둡고, 가장 접근하기 힘든 벽과 천장에서 발견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니오에 있는 크로마뇽인의 그림들은 동굴입구에서 반마일(800m)이상이나 더 깊숙이 들어가야 찾을 수 있다. 그 당시 불을 밝힐 수 있는 유일한 연료는 동물의 지방이었으므로 연기와 함께 지글거리는 소리를 내며 타들어가는 횃불이나 원시적인 등잔의 흐릿한 불빛에라도 의지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술가의 창작품을 구경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남아있는 증거에 의해 판단컨대, 크로마뇽인은 작품을 완성 한한 에는 그들의 벽화에 대체로 무관심했다. 이미 완성된 작품 위에 같은 형태로 또는 전혀 다른 형태로 겹쳐서 그린 그림듈이 수없이 많이 있다. 중요했던 것은 분명 완성된 작품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행위였다.
생존경쟁을 돕는 예술
크로마뇽인이 창조한 대부분의 예술 작품의 진정한 목적은 분명히 미감각을 만족시키고자한 것이 아니라 단지 식량으로 쓸 동물의 공급을 늘리기 위한 것이었다. 예술가들은 심미가가 아니라 주술사였고 예술은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기 위해 고안된 주술의 일종이었다. 크로마뇽인의 예술이 갖는 의의와 그들의 예술적 특성의 바탕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왜 위대한 벽화들의 주체가 대부분사냥감인 동물들이었는지 그리고 왜 이들 벽화에 식물과 무생물은 거의 등장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이것은 또한 크로마뇽인이 왜 완성된 그림은 소홀히 여기고 그것을 만드는 과정에만 주로 관심을 가졌는가 하는 이유를 이해하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작품이 동굴에서 가장 접근하기 힘든 곳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역사 예술가에게 종교적 동기가 있었음-예술이 당시에는 신성한 장소에 있는 비밀스러운 것이었음-을 입증해 준다.
후기 구석기 시대 문화의 종말
후기 구석기 시대문화는 식량 공급이 달리게 되면서 기원전 1만 년경에 종말을 고했다. 빙하가 북쪽으로 후퇴하고 남부유럽의 기후가 순록이 살기에는 너무 따뜻해지자 크로마뇽인도 점차 발트해연안으로 이주해 갔다. 매머드는 같은 이유에서였는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후 멸종되고 말았다. 아마도 크로마뇽인은 순록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해 갔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후의 어떤 문화적 업적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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